노래방
재즈의 영혼을 노래한 가수..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음악적 동료인 레스터 영이 지어준 'Lady Day'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보컬로 평가 받는다. 억양과 템포를 조절하는 새로운 보컬 형식을 창조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노래에 이입하여 진심어린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평론가 존 부시는 "미국의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라고 평하였다.
Billie Holiday - Summertime
Billie Holiday - The Blues Are Brewin
1915년 4월 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16살, 어머니는 13살이었다고)
1차대전 참전 후 유랑악단과 함께 도망간 아버지와 백인가정의 흑인 하녀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버림을 받았다. 결국 외가에 맡겨진 채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다.
어느날도 평소와 같이 외할머니의 품에서 잠은 잤는데 어린 빌리의 목을 감싸 안은 채 할머니가 숨집니다.
빌리는 할머니의 팔에 감기어 빠져 나오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때 충격으로 한 달간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합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친모가 백인 남자와 재혼을 하며 그녀를 다시 데려갔으나, 이복 백인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집니다.
그녀 나이 열 살이던 1925년 마흔 살 가량의 백인 남자 딕크의 집에서 허드랫 일을 해주고 있었는데,
이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빌리는 이 남자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오히려 불량소녀로 몰려
감화원으로 보내집니다.
2년 뒤 어머니의 도움으로 감화원에서 나오지만, 얼마 후 한 흑인남자로부터 또 다시 성폭행을 당합니다.
어머니는 빌리는 데리고 뉴욕으로 이주, 정규교육을 받게 되지만 그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경제고에 시달려 결국 뉴욕 할렘의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성행위를 거부하다 결국 밀고 당해 경찰로 넘겨졌고 빌리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두 차례의 철창행을 지게 됩니다.
이후 빌리는 사창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하녀 생활을 시작하나 곧 미국에 불어 닥친 경제 대공황으로
두 모녀는 길거리를 전전하게 됩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밀린 방세를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날 쫓겨난다는 절박감을 안고 발길 닿는 데로
거리를 걷고 또 걷다 할렘가의 '포즈와 제리즈(Pod`s & Jerr's)라는 나이트클럽을 지나게 되었는데..
댄서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들어가 댄서라고 속이고 춤을 춰 보이지만 오히려 지배인에게 욕만 먹습니다.
그러자 이를 측은하게 보던 피아노 연주자가 노래를 해 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하자,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고
모두들 노래 솜씨에 놀라게 되고 곧바로 주급 18달러짜리 가수가 됩니다.
훗날 그녀가 감회하며 말하길..
"나는 뒤 늦게 그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것을......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이 때부터 제대로된 이름조차 없었던 그녀는 '엘리노어 페이건'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당시 좋아하던 배우 '빌리 도브'와 아버지 성인 '홀리데이' 따 '빌리 홀리데이'라 칭했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빌리는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을 줍지 않았는데, 이유인 즉 허리를 숙여 돈을 줏으려면
가슴이 다 내보이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그녀가 무슨 요조숙녀라도 되는냥 농담 삼아 부른 것이
그녀의 닉네임 '레이디 데이 (Lady Day)'의 시초이다.
후에 어느 돈많은 손님이 이런 빌리의 모습을 보다못해 손에 직접 팁에 쥐어주었는데,
이후 모든 손님들도 빌리 홀리데이만큼은 이렇게 손에 직접 쥐어주었다고 합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명성이 커지면서 수 많은 유명 재즈아티스트들과 활동하게 되었는데, 당시 스윙재즈의
대표자격인 ‘아티 쇼(Artie Show)’는 그녀를 찾아와 보스턴 공연여행을 제의합니다.
백인 악사 13명과 함께 흑인 여성보컬로서 백인 무대에 서야 했는데, 이때 공연여행 중 많은 인종차별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부터 스트레스로 마리화나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특히 1937년 2월 그녀가 가수로서 이름을 내기 시작하던 해, 다시 연락이 오가던 아버지가 공연여행 중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그에게 병실을 내어준 병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사망으로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성은 더욱 깊어졌고,
'Strange Fruit', 'God bless the child' 등 인종차별에 관한 노래들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부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합니다.
1940년대에 이르자 빌리 홀리데이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졌고, 1944년 '에스콰이어 재즈 비평가상'을,
1946년 '올해의 메트로놈 보컬리스트상'을 받습니다. 그녀의 공연 일정은 항상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대중은 그녀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1941년 제임스 몬로와 결혼한 빌리는 그가 아편 중독자임을 알게되고 곧 이혼했으며,
1944년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조 가이 역시 헤로인 중독자였다. 1945년 조 가이가 숨지자
빌리는 더욱 더 마약과 알콜에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1947년 마약소지로 인해 체포되었고 웨스트 버지니아주 감옥에서 1년 정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뉴욕 클럽 Ebony의 사장인 존 레비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무대에 서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의 연인이 됩니다.
그러나 레비 역시 빌리를 이용한 다른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빌리는 다시 한번 마약소지로 체포되나 무혐의로 풀려나게 됩니다.
1952년경 빌리 홀리데이는 루이스 맥케이를 만나고 있었으며, 둘은 마약소지로 같이 체포되었으며
풀려난 후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맥케이 역시 빌리의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데만
급급했는데, 빌리는 TV쇼와 많은 앨범 녹음을 내게 됩니다.
1959년 뉴욕 공연을 마지막으로, 빌리 홀리데이는 심장문제를 이유로 맨하탄의 병원에 입원했으나
죽은 그날까지도 마약소지로 혐의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진료 기록판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재즈의 영혼을 노래한 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빌리 홀리데이의 첫 독집 음반은 1936년에 취입된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CBS 컬럼비아]였다.
즉,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3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창법이나 노래 스타일은
한참이나 옛것에 머물러 있었다. 1927년에 상영된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 이후 '재즈 싱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유행되기 시작했다면 빌리 홀리데이는 그 이전까지의 블루스 가수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악기를 연주하듯 목소리만으로 즉흥적인 솔로를 펼치던 재즈싱어로서의
혁신성 보다는 블루스의 원초적인 정서를 재즈 사운드에 보태는 가수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유지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을 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음악을 배운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내 노래 스타일이 어디서부터 발전된 것이냐고 묻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나는 단지
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하고 그렇게 할 때 사람들도 뭔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때로는 스스로 지나치게 감성적인게 아닐까 고민할 정도죠" 빌리 홀리데이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이 말했듯,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적인 해석은 대부분 천부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의 표현이 아니었다면
빌리 홀리데이의 존재감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블루스와 재즈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블루스와 소울의 영역이 지배했던 그녀의 스타일만으로 재즈싱어로서의 역할이 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가 '레이디데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는 지난 회(최고의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에 다루었던 레스터 영(Lester Young)이
붙여주었다는 설, 이때 빌리 홀리데이는 '프레지던트 레스터' 라는 애칭을 레스터 영에게 답례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클럽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절대 허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는 도도한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에 항상 머리에 치자꽃 한 송이를 꽂고 출연했다는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더해본다면
그 어떤 것이 사실이든, 모두가 그녀의 이미지를 반영한 것인 만큼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추측해 보건데 노래하는 빌리 홀리데이는 거칠었던 삶과는 다르게 소위 '요조숙녀' 가수였던 것이다.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 1939)'은 미국 남부의 백인 폭도들에게 살해되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가련한 흑인을 비유한 노래였다. 억눌린 분노와 슬픔을 담고 있는 이 노래와 더불어
루이스 앨런의 시를 노래한 'God bless the child(1941)' 역시 재즈의 저항주의를 메시지로 담아낸
곡이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아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들은 그 자체로 '흑인과 재즈의 역사'를
반추하는 한 편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1959년 7월 17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녀의 진료 기록에는 '마약중독 말기증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 번의 불행했던 결혼을 거치며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결혼생활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빌리 홀리데이는 최후의 명연으로 전해지는 작품 [Lady In Satin](1958) 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툰과 글을 가져온 곳 :
http://cafe.daum.net/yeilmusic/L9bf/39?docid=juTd|L9bf|39|20101001003011&q=%BA%F4%B8%AE%20%C8%A6%B8%AE%B5%A5%C0%CC
앨범
1956년 1집 Songs for Distingue Lovers1991년 The Essence Of Billie Holiday1993년 16 Most Requested Songs1994년 Verve Jazz Masters 121994년 Jazz-History : Don't Explain1995년 Billie Holiday's Greatest1995년 Jazz Masters 471996년 2집 Love Songs1998년 The Quintessential Billie Holliday Vol.I, II & III2000년 Strange Fruit2001년 Lady Day2001년 Gloomy Sunday2002년 3집 Lady In Satin2002년 Lady Day Swings!2002년 Fine And Mellow (Prestige Vintage Jazz Greatest Series)2002년 Blue Billie2003년 The Billie Holiday Collection, Vol.12003년 Love Songs 22003년 The Billie Holiday Collection, Vol.22005년 Billy Remembers Billie2004년 Lady In Satin 'Remastered'2006년 Stay With Me 'Remaster'2006년 International Jazz All Stars Vol.112006년 4집 Fine And Mellow2006년 5집 Love For Sale
2009년 Beautiful Memories
블로그안에서 2009년 앨범(Beautiful Memories) 수록곡 듣기
Billie Holiday - I'm A Fool To Want Youhttp://blog.daum.net/paulsong/158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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