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방
라면은 신산한 타향살이의 동반자다. 1960년대 후반 대학에서 조교를 하며 연구실에서 숙식했던 문학비평가 고(故) 김현의 '〈라면〉 문화 생각'이다. "서너 달쯤 라면을 끓여 먹으면 냄비 밑바닥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때에는 물을 적게 하여 거의 떡처럼 만들어 그것을 술안주로 먹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와전된 것으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선수의 한 마디가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1973년 석유파동 때처럼 경제상황이 심각해지거나 안보위기의식이 확산되면 라면 사재기가 재연되곤 했다. 라면은 한국인들에게 비상식량이기도 하다. 1975년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등장시킨 농심라면 광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를 내세웠다. 인스턴트 음식의 인공성과 편리함을 농촌적 심성과 전통적 미덕으로 감싸 안았던 셈. 우리는 아무에게나 라면을 양보하지도 않고 아무하고나 라면을 함께 끓여 먹지도 않는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하는 말 "라면 먹고 갈래요?"는 사랑의 가벼움과 즉흥성도 보여주지만 라면을 함께 끓여 먹는다는 것의 각별한 의미를 보여준다. 격식의 틀을 넘어 친밀성의 차원에 들어서야 비로소 함께 끓여 먹을 수 있는 게 라면이다. 글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출처 : 조선일보 2008.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