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스크랩] 무정열차-남인수/10000duki

DRAGON 2010. 10. 8. 03:12

위키백과

남인수(南仁樹, 1918년 10월 18일 ~ 1962년 6월 26일) 한국의 가수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년 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꼬집힌 풋사랑〉, 〈물방아 사랑〉,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라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친일 가요를 취입[2]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3]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4]되어 있고,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5]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6][7]

 

남인수-무정열차


 

남호걸-무정열차

 

 

 

 

  인생은 가도 노래는 남아

  당신의 이 노래를 당신에게 보냅니다.

  비봉산 양지쪽에 진달래 피고

  진주 남강 백사장에 물새가 울 때

  그 님을 부여잡고 몸부림 치며

  울며 헤진 젊은 날의 푸른 그 추억

  그 추억을 못 잊어서 부르던 노래

  바람에 태워 구름에 태워 보냅니다. 

 

 

♬추억의 소야곡 /남인수 노래


1절
다시 한번 그 얼골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 주는 이 창가에서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2절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 들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고나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
차라리 잊으리라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 슬프다

♬   남인수의 일대기

      남인수의 데뷔 곡 '눈물의 해협' SP음반에
      들어있는 가사지에 있는 사진이다.
      남인수의 데뷔 때의 앳띤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사진.




      1939년 무렵 오케연주단의 모습




      오케 연주단 지방공연 사진.1번- 남인수 ,2번- 고복수,
      3번- 이화자,4번- 이난영, 5번- 김해송, 6번- 김정구,
      7번- 이철- 오케 연주단 단장- 오케레코드사 사장,
      8번- 손목인, 9번- 이은파, 10번- 장세정, 11번- 김용호




      오케레코드 1941년 7월
      신보 목록에 실린 남인수 사진.




      오케레코드 '안개 낀 상해' 가사지에 실린
      남인수 사진.




      남인수의 고향인 진주 촉석루 아래에서 찍은 사진
      맨 왼쪽이 남인수,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작사가 구완회
      맨 오른쪽이 작사가 박영호




      작곡가 이용준(왼쪽), 남인수(오른쪽), 미상




      백난아(당시 19세, 왼쪽)과 남인수 부부
      (중앙- 남인수, 오른쪽- 김은하) 가 일본 전국
      순회공연 중 분장실에서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김은하는 당대 한국 무용계의 1인자였다.



      조선악극단 멤버들의 사진 앞줄 왼쪽 부터 이난영,
      서봉희, 이화자, 맨 끝이 단장 이철 가운데줄 왼쪽 부터
      이봉룡, 남인수 뒷줄 두번째 부터 엄재근, 송달협,
      김정구 지휘봉을 든 사람이 손목인




      1940년 남인수의 눈오는네온가 광고 사진



      40년대 말 이난영, 장세정, 김정구와 국도극장에서.



      군예대 시절. 앞줄 왼쪽이 남인수, 그 옆이 가수 금사향이다.



      50년대 시민회관 공연사진- 맨 왼쪽이 이인권,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복수 왼쪽에서
      세번째가 남인수이고, 네번째가 김정구 이다.



      50년대 중반
      작곡가 손석우와 함께 중앙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태평양 가극단의 포스터이다.
      정중앙이 남인수



      50년대 극장 포스터이다. 가요계 황제-남인수,
      가요계 여왕- 신카나리아 모던가수- 고운봉,
      오리엔트 전속- 김용태, 가요계의 호프- 김백희 등의
      광고문구가 보인다.




      57년경 남인수



      1958년 국도극장 공연에서-
      앞줄 외쪽부터 영화배우 김지미, 이난영
      뒷줄 왼쪽부터 계수남, 남인수, 영화배우 이민, 고운봉, 김선영.



      남인수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이난영.



      50년대 말 남인수와 이난영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동휘, 일곱번째가 최병호
      앞줄 왼쪽부터 손석봉, 남인수, 황금심, 고복수,
      박진(전 국립극단장), 한 사람 건너 최남용



      앞 줄 외쪽부터 남인수, 신카나리아, 황금심, 고복수
      57년 고복수 은퇴 공연 때 찍은 사진



      남인수 친필문서-
      59년 가수협회장이던 남인수가 반야월에게 보내는 편지



 

 

 

 

 

 

 

 

 

 

 

 

 

 

 

 

 

 

 

 

 

 

 

출처 : toyohikingclub
글쓴이 : 10000duki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