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방

[스크랩] 중국 우한

DRAGON 2010. 11. 15. 16:18

 
  
 
중국인들은 우한(武漢)을 곧잘 ‘대륙의 배꼽’이라고 부른다. 신장위구르나 티베트 등 황막한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중국의 정 중앙인 장강 중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북쪽에는 베이징과 톈진, 남쪽에는 광저우와 선전, 동쪽에는 상하이와 항저우, 서쪽에는 청두와 충칭 등이우한을 중심으로 약 1천10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또한 장시·안후이·후난·쓰촨·산시·허난성들과 인접하고 있어 예로부터 ‘아홉 개 성(省)으로 통하는 사통팔달한 길’이란 뜻으로 ‘지우성통취(九省通衢)’라고도 불렸다.
 
3천500년 전부터 도시로 발달

이런 지정학적 위치로 중국의 변화는 우한에서 시작되곤 했다. 우한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우한의 역사는 약 3천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商)나라 때 지어진 반룡성(盤龍城) 유적이 발견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랜 역사 도시라고 하는데, 현재 기술로는 개발과 보존이 어려워 계속 발굴을 유보하고 있다.

동한(東漢) 말년(200년경)에는 손권과 유표가 이 지역을 얻고자 많은 전쟁을 치렀다. 서기 223년에 손권이 장강 남안에다 형주로부터 장강을 따라 내려오는 수군을 감시하기 위한 전망대를 지은 것이 후세에까지 이름난 황학루의 전신이며, 이 때 쌓은 성으로 우창지역이 장장 천 수백 년 동안 발전하게 됐다. 그러니까 초기의 우한은 장강 이남의 우창지역 뿐이었다. 

현재 강북의 한커우는 명나라 말기에 와서야 형성되기 시작했다. 장강을 따라 부두가 줄지어 들어서면서 후광성(현재의 후베이성, 후난성)의 곡물, 소금 운송 집산지로 지정된다. 이로써 급속히 발전하게 된 한커우는 청나라 때 이미 우창을 추월하고 지아칭(嘉慶)황제 때부터는 장시성 경덕진, 허난성 주산진, 광둥성 불산진과 함께 중국 4대 명진(名鎭)이 됐다.
 
양쯔강 본류와 제일 긴 지류인 한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우창과 한양, 한커우 세 지역은, 1949년 새 중국이 들어서면서 우창의 우(武)자와 한커우, 한양지역의 한(漢)을 따서 우한으로 통합됐고, 1957년 교량부분만 1.1킬로미터에, 위로는 차량이, 아래로는 기차가 통과하는 장강대교가 건설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도시가 됐다.
 
한양, 한커우, 우창 세 지역 통합 

우한은 북방처럼 눈이 많이 오지도 않고, 동부나 남부처럼 태풍도 없고, 황사도 없는 고장이다. 또 역사 유적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삼국지 고사 총 120부 중 75부가 후베이(湖北)성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니 가는 곳마다 유적지요, 들리는 것마다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호지성(千湖之省), 어미지향(漁米之鄕)으로 불리는 후베이성 성도로 면적 8천400평방킬로미터에 인구는 약 800만. 장강 수로를 비롯해 경광철도, 7개의 고속도로가 지나는 교통요지이자 물자 집산지로 상업, 금융, 문화가 발전한 도시다. 또 큰 호수(東湖)를 품고 있는 등 여러 면에서 미국 시카고와 닮은 부분이 많아 ‘동방의 시카고’라 부르기도 한다.
 
  
 
우한의 관광 명소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곳들이다. 최호의 시구와 더불어 2천여 년 전부터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황학루와 후베이성의 긴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후베이성박물관은 여행객들은 물론 업무차 현지를 찾는 출장자들도 꼭 시간을 내어 둘러보는 곳이다.

또한 33평방킬로미터 면적으로 바다를
 
 연상케 하는 동호나, 각기 얼굴 표정이 다른 오백나한으로 유명한 사찰 귀원선사, 그리고‘지음(知音)’이란 단어를 탄생시킨 유백아와 종자기의 아름다운 전설의 진원지 고금대와 이태백이 매를 날리던 방응대도 우리 일상에서 자주 접한 단어들의 현장이어서 더 정겹다.

이 밖에도 떠우웨지아오(斗越椒)가 초장왕을 향해 쏜 화살이 빗나가 초장왕의 북 틀을 맞힌 지점이라 해서 명명된 구쟈산(鼓架山), 적벽대전 후 조조를 격파하고 돌아가던 중 노숙(魯肅)의 백마가 진흙에 빠져 죽어 이름 지어진 백마주, 우창지역에 감금돼 있던 명나라 주원장의 여섯째 아들 주쩐(朱楨)이 궁을 그리면서 피리를 불어 이름 지어진 추이디싼(吹笛山), 조조가 묵어 간 후 이름이 된 조조묘 등 수많은 지명들에 담겨진 고사들을 들어볼 수 있으며, 근대로 손문의 신해혁명 전야 서무를 보던 호북정부 건물, 서양식 건물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한커우의 옛 조차지, 장강을 지척에서 굽어볼 수 있고 7.5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길이가 제일 길다는 강탄공원 등도 둘러볼 수 있다.
 
단오절의 기원 굴원, 삼국지의 제갈량 유적

우한을 둘러싼 후베이성도 중국 관광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자연 경관과 역사 유적의 보고다. 앞서 언급한 총 120부 삼국지 고사 중 75부에 관련되는 유적지를 포함, 적벽대전의 발생지인 적벽, 지금도 보존이 잘돼 있는 형주성, 자연과 인간의 기적을 자랑하는 장강 삼협과 댐, 대협곡과 석림과 종유동들이 함께 모인 은시 자치주, 세계문화유산 우당산….
 
또한 후베이성은 죽어서도 백성의 존경을 받아 단오절의 기원이 된 굴원(屈原)과 중국 고대의 4대 미인 초선(貂嬋) 그리고 본초강목을 집필한 이시진의 고향이며, 제갈량의 10년 은둔지, 신농씨가 백초를 먹어가며 약재를 캐던 곳으로 설인의 출몰로 유명해진 썬눙쟈(神農架)  등 볼 곳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 유적과 역사 현장이 너무 흔해선지 대부분 발굴이나 개발을 하지 않아 세월의 두께에 지워져 가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나마 최근에야 문화재의 가치와 보존 문제가 거론돼 적벽대전 지역을 관광지로 새롭게 단장하고, 그 유명한 형주성과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했던 양번(襄樊)시의 양번성 개·보수를 논의하고 있는 정도다.
 
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된 ‘적벽대전’ 현장

적벽대전 고전장(古戰場)은 우한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비록 볼 만한 자연 경관은 없지만 이곳을 흐르는 강물을 마주하고 조조의 20만 대군이 불에 타 크게 패한 장면을 조용히 상상해 보는 것도 여행길에 가치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형주(荊州)시는 우한시 서쪽에 위치하는데, 차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적벽, 우한과 삼각형을 이룬다. 형주에는 형주성이 잘 보존돼 있으니 갈 길이 급하지 않다면 형주박물관과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도시가 고속도로 옆에 위치해 의창, 삼협, 은시나 또는 후난성 장가계로 가는 여행객이 이곳을 쉼터 삼아 둘러보고 간다.

형주에서 서쪽으로 1시간 30분 정도 차를 달리면 유명한 삼협댐이 있는 의창(宜昌)이 나온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삼협댐은 먼데서 보거나 댐 위로 올라가 봐도 똑같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멀리 상하이까지 공급된다. 한때는 쓰촨성 대지진이 삼협댐 공사로 생긴 지각 변동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공사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삼협 방문 관광객들은 댐 아래서부터 출발하는 관광을 더 선호하는데, 유람선에 올라 113미터에 달하는 낙차를 5개 갑문을 통해 두 시간 만에 거슬러 올라간다.
 
천하가경 ‘삼협’과 건축 기적 ‘향대’

댐 위로부터 장강을 따라 차례로 서릉협, 무협, 구당협 이렇게 삼협을 통과하는데, 댐 공사로 수위가 40미터에서 최고 70미터까지 올라갔지만 장강 양안을 따라 아스라이 높은 봉우리들이 가지각색의 기이한 형태를 뽐내며 솟아 있는 그 위용은 여전하다. 이곳은 중국을 대표하는 10대 풍경구에 항상 포함된다.

가장 상류에 위치한 구당협을 빠져나오면 유비가 제갈량에게 탁고하고 죽은 백제성에 도착하는데, 이 구당협 입구의 풍경이 워낙 빼어나 10위안짜리 지폐에도 인쇄돼 있다.

의창에서 갓 개통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세 시간 정도 이동하면 소수민족 집단 거주 지역인 은시(恩施)자치주에 이른다. 이색적인 소수민족 문화와 뛰어난 자연 풍광으로 개발된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되는데도 외국인 방문객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은시 대협곡이나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종유동인 등룡동은 자연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알맞아 날로 인기를 더하는 여행 코스이기도 하다.
 
제갈량의 삼고초려와 장삼풍의 우당산
 
우한에서 서북쪽으로 네 시간 가량 떨어진 양번시에는 양번성과 제갈량이 10년간 은둔 생활을 했던 고융중(古隆中)이 있다. 삼고초려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이 양번에서 서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유명한 우당산이다. 중국 도교문화의 발상지이자 태극권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장삼풍의 본 고장이다. 그 자체가 관광 코스로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데, 요즘은 후베이성에 있는 2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산정에 지어진 도교 사원과 벼랑 끝으로 뻗어 나간 바위 위에 지어진 향대는 인간 건축사의 기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당산에서 차로 계속 서쪽으로 30분 정도 더 가면 십언(十堰)시가 나오는데, 중국 건국 초기 자동차공업을 전쟁의 위험에서 건지고자 내륙으로 은폐시킨 곳이다. 시 전체가 동풍자동차 생산기지 같은데, 시 주변에는 공룡알 화석군, 100만 년 전의 인간 두개골 화석 발견지 등 유명 유적들이 많다.
 
 
고금대 방문객 쇼핑센터 한 켠의 조그만 공간에서 유백아가 연주하던‘고산유수’란 곡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이 곡은 악보로 전해져 온 것이 아니고 이 지방 거문고 명인이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지만 고사의 주인공이 연주했던 그 자리에서 들어보면 감동이 새롭다.

연주자는 고금대 관리소장으로 한평생을 거문고와 함께 살아온 노인으로 중국식 고대 복장을 차려 입고 방문객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거문고를 연주한다. ‘고산유수’외에도 여러 곡을 연주하며 사이사이 고금대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보통 20분 남짓 연주하는데, 방문객들이 원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역사 이야기와 거문고 연주를 계속해준다.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연주는 무료지만 인민폐로 15위안짜리 차를 사 마시는 게 예의. 은은한 차 향기와 거문고 연주를 들으며 유서 깊은 ‘고산유수’를 음미해 보는 것은 예기치 못한 여행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치안  북부 지역처럼 술을 많이 안 마시며 저녁에 길거리에 나서도 취객이나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없다.  택시 바가지 요금도 거의 없다. 그래도 야간에 으슥한 뒷골목은 위험하며 걸어 다닐 때 핸드백은 몸 앞쪽으로 놓고 식당 의자 등받이에 옷을 걸쳐 놓을 때는 커버로 씌우는 등 안전 조치는 어디서나 필수.

  관습  우한 사람은 양보가 없고, 마찰이 생기면 끝까지 따지고 달려든다. 그러나 적당히 져주거나 양보하면 바로 끝나는 편이다. 중국인들조차도 우한 사람을 ‘천상구두조(天上九頭鳥) 지상호북로(地上湖北老)’라고 부르며 시비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한다.

  식수  수돗물은 절대 그냥 마셔서는 안 된다. 석회수인데다가 수도관 오염이 심하다 보니 바로 탈은 안 나더라도 건강에 좋지 않다. 생수를 사서 마시자.

  교통  최근 자동차가 엄청 늘었으나 운전자들의 의식 수준과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교통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 차선을 쉴새 없이 바꾸고, 무조건 새치기로 차 머리부터 들이대기 일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는 웬만한 용기와 속도가 없이는 건널 수 없으므로 요주의.
  
 
   
 우창어(武昌魚)  악주(鄂州)시 양자호와 장강이 통하는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 예전에는 전부 조정에 바치는 공물이었다. 우한을 방문한 마오쩌둥 주석이 식사한 후 유명해졌다. 위에 좋고 혈을 보하며 빈혈증, 저혈당, 고혈압과 동맥경화 등의 예방 작용이 있다고 한다. 찜, 국, 튀김, 구이 등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러깐멘(熱干面)  개발된 지 80년 된 대표 음식으로 일종의 비빔국수. 색상과 먹는 방법만 보면 한국식 자장면을 방불케 한다. 전날 쌀국수를 삶아 기름을 발라 말렸다가 다음날 아침에 뜨거운 물에 두어 번 걸러낸 후 깨장을 비롯한 각종 양념을 넣어 비벼서 먹는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떠우피(豆皮)  쌀가루에 콩가루를 조금 넣고 반죽한 후, 화로에 달군 솥에 기름을 두르고 굽는다. 여기에 계란과 찹쌀밥, 쇠고기, 표고버섯, 무 절임, 죽순, 파 등을 잘게 썰어 뿌린 다음 익힌 것이다. 아침식사 또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주식으로 내놓는다.
                  
 
 
 
 바이윈비엔(白雲邊)  후베이성 쑹즈(松滋)에서 생산되는 대표 명주. 처음에는 중국에서 유명한 꾸이저우 마오타이와 산시 펀쥬의 특점들을 조합 제조해 술 맛이 특이하다고 알려졌으나, 이태백이 쑹즈지역 장강에서 배를 타고 읊었던 시구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빠이쥬(白酒)로 알코올 도수는 42도다.
 
 연근가루  물이 많은 고장이다 보니 연근도 많이 나 연근으로 만든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 중 연근가루는 먹기도 편하고 휴대하기도 좋아 선물용으로 인기다. 미숫가루를 먹듯이 뜨거운 물에 풀어 먹으면 된다.
 
 은시 옥룡차  은시 자치주 남부의 오봉산에서 많이 난다. 후베이성은 당나라 때부터 차 재배 지역이었고, 특히 은시지역은 현재 무공해 지역으로 공인받고 있다. 중국 명차 톱 10에도 뽑힐 정도. 다선(茶仙) 루위(陸羽)의 다경에 소개된 방법으로 제조해 더욱 인기가 높다.

  
  
우한(武漢) 시내 사산(蛇山)에 있는 황학루(黃鶴樓)는 중국의 시성인 이백을 비롯해 백거이, 가도, 육유, 소식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모두 한번쯤 거쳐간 곳이다. 물론 마오쩌둥 등 국가 주석들도 방문했을 만큼 유명하다.

삼국시대에 건립된 황학루는 후난성의 악양루와 장시성의 등왕각과 함께 중국 강남 3대 명루(名樓)로 꼽히며, 이곳에 오르면 우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외견상 5층이나,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9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승강기도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누각 꼭대기에는‘황학루’라 쓴 큰 현판이 결려 있고, 1층 입구에‘기탄운몽(氣呑雲夢 : 기세는 운몽-옛 형주의 땅, 현재의 우한-을 삼킨다)’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황학루는 그 동안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훼손과 재건을 무려 10차례나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훼손된 시기는 청 광서(光緖) 시대(1875~1908)이며, 1980년대 국가 중점사업으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황학루에는 많은 신화적 요소와 예술적 향기가 담겨 있다. 먼저 이 누각의 유래부터 신화적이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 하나라의 성군 우임금은 장강이 범람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치수에 전념했다. 이 광경을 본 옥황상제께서 거북이와 뱀을 보내 각각 큰 산으로 변하게 해서 장강의 범람을 막았다. 이를 보고 감동을 받은 두 마리의 선학(仙鶴)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뱀이 변한 산을 사산이라 하고, 선학이 내려온 곳에 누각을 지어 황학루라 명명했다고 한다.
 
뱀이 변해 ‘사산’ 선학이 내려온‘황학루’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어느 주막에 어떤 도사가 들러 술을 마셨는데, 주인이 도사의 술값을 받지 않자 감사의 뜻으로 귤 껍질로 벽에 선학 한 마리를 그려주고 떠났다. 그런데 그 뒤 그림 속의 선학이 주막에 손님이 들면 밖으로 튀어나와 춤도 추고 술도 권하는 조화를 부렸다. 그 선학은 10년 후에 도사가 다시 주막을 찾아왔다가 피리를 불며 하늘로 올라갈 때 함께 따라 올라갔다. 이에 주인장은 사산에 누각을 짓고 황학루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여러 설이 분분한데, 이런 신화적인 요소가 관광객을 유혹하는 좋은 재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누각이나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많은 시가들이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경물시(景物詩)라고 하는데, 그 소재로 가장 많이 채택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황학루다. 문헌에 따르면 황학루를 소재로 한 시가는 현존하는 것만 무려 300수가 넘는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고르라면, 아마도 누구든지 최호(崔顥)의 ‘황학루’를 추천할 것이다. 이 시는 시성 이백이 황학루에 올라 감흥에 젖어 시 한 수를 지으려다가 최호의 시를 보고 탄성을 자아내며 붓을 꺾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옛 선인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고,
이 곳에는 공연히 황학루만 남았네.
황학은 한번 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고,
흰구름만 유유히 떠있네.
맑은 강물에는 한양의 나무들 역력히 보이고,
향기로운 봄 풀만 앵무주에 무성하네.
날은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 멘가?
안개 낀 강물에 더욱 시름겹네.
 
이 시는 칠언율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전반부는 세월에 대한 감개무량함을, 후반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했다. 송대의 문학평론가 엄우(嚴羽)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칠언율시라고 극찬했고, 청대의 심덕잠(沈德潛) 등 여러 문인들도 천고의 절창으로 추앙했다.

최고의 명작인 만큼 서로 다른 판본이 유통되는가 하면, 모방작도 생겨났다. 여러 판본 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부분은 첫 구의 두 글자다.‘당시고취(唐詩鼓吹)’등에는 ‘황학(黃鶴)’으로,‘국수집(國秀集)’등에는 ‘백운(白雲)’이라 되어 있다. 후자가 맞는다면 ‘황학루’의 첫 구는‘옛 선인이 흰 구름을 타고 가버리고’라고 해석해야 맞다.

도교에 따르면, 옛 신선은 황학을 타기도 하고, 백운을 타고 다니기도 했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볼 때는 둘 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시기적으로 볼 때, ‘백운’으로 기록한 당대의 ‘국수집’등 판본이 ‘황학’으로 기록한 원대의 ‘당시고취’등 판본보다 먼저기 때문에 ‘백운’으로 봐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백운이냐  황학이냐’ 기록 분분 

시기적으로 볼 때는 ‘백운’이 맞겠지만, 의미전달 면에서는 ‘황학’을 타고 가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리고, 훗날 이백이 최호의 ‘황학루’를 모방해 지은 ‘앵무주(鸚鵡洲)’와 ‘봉황대(鳳凰臺)’에서도 ‘백운’을 사용하지 않고 새의 일종인 앵무새와 봉황을 시재(詩材)로 삼은 것을 보면, 아마도 ‘황학’이 맞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약 ‘황학’을 ‘백운’으로 고친다면, 그 동안 전해 내려왔던 아름다운 신화적 요소가 일시에 사라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황학루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던 매력적인 추억 또한 지워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던 ‘황학루’지만, 막상 저자 최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최호는 진사과에 급제한 수재지만 도박과 음주를 좋아했으며 미모의 아내를 취한 후 네 번이나 버렸다는 것. 이를 근거로 최호를 ‘무사행(無士行)’이라고 폄하했다. 그 뜻은 말 그대로 “선비다움이 없다”라는 것이다.
 
최호가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약간 억울한 점이 없지 않다. 먼저 도박과 음주는 당시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두세 명의 첩을 거느리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남의 사생활까지 들춰내어 최호를 폄하한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권문세가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태도 때문이다.

최호는 당대의 수도 장안을 묘사한 ‘장안도(長安圖)’에서 “가난하고 천하니 속여도 된다 하지 마라, 사람 태어나 부귀할 날 언젠가는 있으리”라며 권력층을 노골적으로 비난했으며, 과거시험 전에 권력층에 시 한 수를 바치는 ‘헌시(獻詩)’에 권력가들을 조롱하듯 ‘염시(艶詩)’를 바쳐 ‘무례하다’는 질책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관계에 진출하고서도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며, 선비답지 못하다는 혹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황학루에 오르려거든 혹시 모르니 우산을 챙겨가야 한다. 비 맞기가 싫어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비와 안개 속에 숨어있는 몽롱하고 신비로운 매력덩어리를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조은상 / 배재대학교 교수·중국문학>
 
출처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 100125 현재
 
 
출처 : 종, 그 울림의 미학
글쓴이 : 하늘빛 원글보기
메모 :

'여행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체코 프라하  (0) 2010.11.15
[스크랩] 중국 옌지  (0) 2010.11.15
[스크랩] 인공파라다이스 두바이  (0) 2010.11.15
[스크랩] 일본 아키타  (0) 2010.11.15
[스크랩] 중국 광저우  (0) 201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