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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선양

DRAGON 2010. 11. 15. 16:05

 
 
 
 선양(瀋陽)은 중국 동북부 남쪽의 랴오닝(遼寧) 반도의 중심 랴오닝성의 성도(省都)이자 이 지역 경제, 문화, 교통, 산업, 금융, 과학, 정보의 중심지다. 중국 최대의 중공업 기지로서, 중국 내 219개 도시 중 사회 전반에 걸쳐 제5위에 해당하는 대도시다.

랴오닝성의 면적은 13만 평방킬로미터로 우리 남한의 약 1.3배이고, 인구는 약 800만 명. 다민족 거주지로 한족 외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등 32개 민족이 거주하는데, 그 중 조선족 인구는 8만 5천 명 정도다.

선양이란 이름은 현재 시 중심을 통과하고 있는 훈허(渾河)의 옛 이름인 선쉐이(瀋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지역 명칭을 잘 살펴보면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데, 강의 이북에 위치하면 강 이름에 ‘양(陽)’자를 붙인다. 그러니까 선양은 선쉐이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음양오행설에 따른 것으로, 물의 북쪽은 양이고 물의 남쪽은 음이며, 산의 북쪽은 음이고, 산의 남쪽은 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선양은 예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문화적으로 중국 동북부 지방의 중심으로서 발전해 왔다. 일찍부터 랴오허(遼河)유역에서 문화를 이루어 신석기 시대인 7천 년 전부터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한(漢) 왕조(B.C.206 ~ A.D.220) 기간인 2천 년 전에 첫 지방 행정 조직이 들어섰고, 청(淸) 왕조(1644~1911)의 창시자 만주족 누르하치가 랴오양(遼陽)에서 선양으로 1625년에 수도를 이전,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 황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전인 1634년까지 청의 첫 수도로서 이름을 성징(盛京)이라고 불렀다. 그는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에도 선양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선양이라는 명칭은 1945년에 다시 복원됐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만주 봉천(奉天)은 일제 침략기 이 도시의 이름이다.

선양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고궁(중국에는 고궁이 베이징과 선양 2곳에 있다)과 2개의 황릉(북릉, 동릉) 및 중국 8대 미술학원 중의 하나인 루쉰 미술학원으로 유명하다. 또한 중국의 첫 우주인 왕용즈(王永志)와 세계적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고향으로도 명성이 높다.

특히 풍부한 주변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중공업이 발달, 기계장비, 자동차, 식품가공, IT 산업, 의약 화공, 유색금속 압연, 철야금 압연, 항공제조업 등 8대 기간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한때 공해가 심한 도시란 오명도 있었으나 지금은 제조공장들이 대부분 현대화를 이루며 도시 외곽으로 옮겨 맑은 공기는 물론 강도 깨끗하고 푸른 숲까지 조성돼 쾌적한 환경을 갖춰 살기 좋은 도시로 변모했다.

 

  
 
선양의 관광은 크게 현대적인 시내 관광, 청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1궁2릉,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는 코스로 나누어 할 수 있다.

시내 관광은 시 중심인 시청사 바로 앞 시정부광장에서 시작한다. 이는 선양에서 제일 큰 광장이기도 하다. 선양의 광장은 크게 시정부광장과 시민광장 두 개가 있다. 시정부광장은 일명 성치(升旗) 광장이라고도 하며, 정면에 시청사를 마주하고 있다. 화강암 바닥 중심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 주위로 잔디밭이 조성돼 낮에는 녹색 초원과 푸른 하늘에 붉은 깃발, 저녁에는 현란한 조명으로 빛나는 멋진 곳이지만 지금은 지하철공사로 들어갈 수 없다.

시정부광장 남쪽에 있는 시민광장은 사면이 잔디밭이고 중앙 바닥은 채색 돌과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다. 광장 중심에는 21미터 높이의 태양새(太陽鳥)란 조형물을 세워 놓았는데, 원본은 신러(新樂) 유적지에서 발견한 약 7천200년 된 목각 조각품으로 추정한다. 광장 동남쪽에 있는 랴오닝성 박물관에서는 당·송·원·명·청대 각종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도심은 시정부광장, 시민광장 중심으로 형성

기름진 중국 음식에 식욕을 잃은 한국인 관광객이라면 시타(西塔) 거리로 보자. 이곳은 선양 시내에 세워진 동서남북 4개 탑 중 서탑 주변의 거리를 일컫는데, 근처에 세계에서는 2번째, 중국에서는 가장 큰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작은 서울이라고도 부른다. 이 곳에서는 많은 한국인과 중국 교포들이 어울려 한국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준다.

선양에는 베이징과 더불어 유네스코에 등록된 1개의 고궁과 2개의 황릉이 있다. 중지에(中街)에 있는 고궁은 청태조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즉 청의 초기 두 황제의 황궁으로,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베이징으로 천도 후에는 별궁으로 이용되다 현재 선양고궁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전면적 약 6만 평방미터에 90여 채의 건물로 태조 티엔밍(天命) 10년(1625)에 짓기 시작해 옛 동경성(지금의 랴오양)에서 수도를 이전했고 태종 충더(崇德) 원년(1636)에 완공했다.

베이징 고궁(자금성)의 약 12분의 1 규모지만, 아늑하고 토착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적이다. 한족, 만주족, 몽골족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건물들로 곳곳에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수많은 보물들도 그대로 진열해 놓아 몽골풍의 기상과 한족의 원숙한 문화를 동경한 만주족의 예술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청 초기에는 만주어를 중시, 자금성과는 달리 전문(殿門) 왼쪽에 만주문자, 오른쪽에 한자를 표기한 점도 눈 여겨 볼 만하다.
 
고궁 내부는 주로 동·서·중원으로 나눠지는데, 동원은 역사가 가장 오랜 건축물로 누르하치 시대에 주로 사용됐다. 대정전은 팔각형을 한 세계 유일의 건축양식으로 이동식 텐트를 모방했다는데, 고궁의 정전으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순치제가 모두 이곳에서 즉위했다. 정면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다섯 발가락의 금룡이 휘감은 2개의 기둥과, 대정전 광장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죄인을 단죄했던 10개의 왕정(十王亭)이 세워져 있다.
 

중원에는 홍타이지 시대의 건물로 숭정전, 청녕궁, 봉황누각 등이 있는데, 숭정전은 정전으로 홍타이지의 집무실이었고, 3층 규모의 봉황누각은 당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연회장으로 즐겨 사용하던 곳. 선양8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청녕궁은 황제와 황후 및 측실의 거실로 4개 동이 있는데,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서원은 베이징 청 입관 후 별궁으로 지었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두던 문소각(文溯閣), 궁중 연회를 하던 희대(戱臺) 등이 주요 건물이다.

북릉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문화재로 홍타이지 황제와 황후의 부부 능으로, 시 북쪽에 위치해 북릉이라 하나 실제로는 소릉(昭陵)이다. 북릉은 1643년에 착공, 1651년에 완공했다. 능묘 앞에 우뚝 서 있는 황색 유리기와로 된 아름다운 전각에서는 그의 아버지 누르하치와 함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만주족 수장의 기개가 느껴진다.

동릉은 태조 누르하치와 황후의 무덤으로 시 동북부의 구릉지대에 540만 평방미터의 광대한 면적을 자랑한다. 1629년 조성된 것을 1929년 공원화하면서 원래 이름 복릉(福陵)을 시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릉이라 개칭했다. 붉은 벽돌담이 능을 둘러싸고 하마비, 석비루(石碑樓) 등이 서 있는 능묘까지는 108개의 계단이 이어지며 뒤로는 천주산이 있고 앞쪽으로는 운하에 면하고 있다. 공원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하 강 2.8킬로미터 유람 ‘구곡은하’

선양에 오면 시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 명소들도 꼭 둘러봐야 한다. 선양에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관문산(關門山) 삼림공원은 운해, 기암괴석, 울창한 수림 등 경관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관문산 5미(五美)’는 아름다운 물, 다양한 나무, 가을 단풍, 거송, 다양한 들꽃을 일컫는다.
 
또한 시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번시(本溪) 시에 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수중동굴 번시쉐이동(本溪水洞)도 빠뜨리면 안 된다. 400만~500만 년 전에 형성된 이 동굴은 번시시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거리를 흐르는 타이즈(太子)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동굴은 매우 넓고 평균 수심도 1.5미터에, 가장 깊은 곳은 7미터나 된다. 총 5.8킬로미터 중 개방된 2.8킬로미터의 동굴을 배를 타고 관람하는데, 구불구불한 지하 강을 따라 펼쳐지는 내부는 그 특색에 따라 삼협(三峽), 칠궁(七宮), 구만(九灣) 등의 이름을 가졌고 총칭 ‘구곡은하(九曲銀河)’라 부르는데, 그 이름처럼 마치 은하수를 건너는 기분으로 끝까지 경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얼런잔(二人傳)은 노래와 춤, 기예 등을 함께 엮은 뒤 코믹한 요소를 가미해 관객의 폭소를 이끌어내는 동북성의 대표적 무대극이다. 원래 얼런잔은 명나라 말 중국 동북지방에서 탄생, 청나라에 걸쳐 서서히 발전해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마당놀이 등이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농촌 사람들이 농한기를 보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것이 발전한 형태다.

지금까지는 동북지방에서나 즐기던 지역축제 식이었지만, 대표적인 얼런잔 배우인 자오번산(趙本山) 등장 이후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동북성 사투리와 말장난으로 외국인들이 알아듣기 어렵지만, 화려한 무대와 신명 나는 악기와 추임새, 그리고 배꼽을 쥐고 웃어대는 관객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대표적 얼런잔 전용극장으로‘리우라오건(劉老根大舞台)’극장이 있으며 맛보기 옥외 공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관습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지금까지도 개를 죽이지도, 개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개가죽 옷과 모자를 착용하지 않는다. 또 만주족이 사는 마당 앞에는 높은 나무를 세워 놓고 꼭대기의 접시에 모이를 넣어놓는다. 그 이유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전쟁에서 쫓겨 다닐 때 아끼던 말이 과로로 죽었는데, 이때 까마귀와 그의 애견이 생명을 구해줬다고 하는 전설 때문. 따라서 그 애견을 기념하기 위해서 개고기나 개털 옷을 금하고, 까마귀를 기념하기 위해서 나무에 모이를 놓아두는 것이다.

 교통  중국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버스 노선이 잘 발달돼 있으나, 일반적으로 택시 가격도 저렴해 시내 이동 시에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기본요금 8위안). 2010년 10월에는 선양시내 동서를 가로지르는 지하철 1호선과 남북을 관통하는 2호선이 연달아 개통될 예정이다.

 기타  선양을 비롯한 중국 동북성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비교적 남부 사람들에 비해 한국사람과 가깝다. 친구간 의리를 중시하고 호불호(好不好)도 명확한 편이다. 또한 선양에는 조선족 동포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 베이징과 더불어 평양으로 향하는 국제항공편을 운항하고 있는 등 북한과의 교류도 상대적으로 많아 의외로 한국어가 가능한 지역이 많다. 
 
 
 
 
▶ 일용잡화  시내 우아이(五愛) 시장은 동북 3성(량오닝·지린·헤이룽장성)에서 열리는 시장 중 가장 큰 도매시장. 의류, 공예품, 장난감, 구두, 가방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일용잡화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중국인 구경은 물론, 한국에서 많이 보던 공산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가격 흥정은 기본!
 
▶ 백주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 명주는 아니나 이 지방 대표주인 ‘라오롱커우(老龍口)’주는 은은한 향과 목 넘김이 좋아 마셔본 사람들이 다시 찾는 좋은 술로 소문이 나 있다. 도수와 숙성연도, 포장 용기 등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칭롱(靑龍 : 주병에 용이 파란색)정도면 괜찮다. 이 지방 대표 맥주‘쉬에화(雪花)’도 중국 내 최대 판매량을 자랑한다. 
 
▶ 청 12대 황제 부채  부채는 중국 어딜 가나 있는 간단한 기념품이다. 선양은 청나라가 시작된 곳이어서 한쪽에는 12명의 황제 그림, 다른 한쪽에는 ‘대청왕조(大淸王朝)’라고 쓴 부채가 제격이다. 우리 손에 쥐기가 조금 크긴 해도 가격이 들쭉날쭉한 다른 유명 관광지와는 달리 10위안이면 살 수 있다. 
 
 
 
 
 라오비엔쟈오즈(老邊餃子)  1829년 변 씨란 사람이 창립한 150년이 넘는 물만두집으로 청나라 때부터 산해관 밖에서는 아주 유명한 식당이었다. 엄선된 재료를 이용해 맛과 향이 감미롭고 느끼하지 않은 것이 특징. 해산물, 야채, 육류는 물론 상상 못할 재료로 빚은 찐만두, 군만두, 탕수만두 등 수십 종의 교자가 인기를 끌고 있다.
 
조선족 요리  시내를 다니다 보면 구석구석 눈에 띄는 것이 한글로 쓰인 조선족 식당의 불고기와 냉면 간판이다. 이곳 불고기는 한국식과 달리 양념에 재우는 것이 아니라 생고기를 숯불에 구워 독특한 소스에 찍어 먹는다. 곁들여 먹는 냉면은 한국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차가운 면에 얹어 먹는 불고기 한 점의 은근한 맛은 중독성이 느껴질 정도다. 북한산 식자재로 만들어 내는 해산물 요리들도 별미로 인기다.
  
  
 
淸 황제가 즐기던 3일간 180 메뉴 ‘만한취엔시’
 
청 건륭황제 때 궁중 요리로 만주족과 한족의 유명 요리를 집대성해 개발한 세계적인 중화 연회 요리다. 원래 연회는 하루에 두 번씩 사흘 동안 진행되는 것이 보통인데, 한 세트씩 순서에 따라 나오며, 세트마다 주요리 하나에 보조요리 4개와 찬음식, 견과류, 꿀전병, 딤섬, 과일이 더해져 30~40가지가 나와 사흘 간 총 180가지의 요리를 맛보게 된다. 하지만 이곳 다시루(大西路)에 있는 전궁위선팡(珍宮御膳坊) 식당에서는 그 중 대표적인 요리를 준비, 주문에 따라 내놓는데, 옛 방식에 따라 전통 복장을 한 주인과 종업원이 나와 환영사를 하고 음식 주문을 받는 예식을 진행해 식사를 하면서도 옛 황제의 도시다운 정취를 체험할 수 있다.

 

 

 
선양고궁은 2004년 7월 1일 중국 쑤저우에서 개최된 제2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전체면적 6만 평방미터에 궁(宮 : 왕족 거처)과 전(殿 : 황제 집무실)을 포함, 총 114개의 전각들이 들어선 이 궁은 1625년에 착공, 증·개축 등을 거쳐 150여 년 뒤인 1783년에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궁은 처음 청태조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랴오양(遼陽)에서 선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몽골족의 황제에 대한 칭호‘따한(大汗)’의 ‘한’자를 빌린 한궁(汗宮) 정도가 전부였다. 이후 청태종 홍타이지가 청조를 수립하고 증축, 황제가 사는 곳이란 뜻을 지닌 황궁(皇宮)으로 만들었다. 이어 1644년 순치제(順治帝)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선양을 배도(陪都, 수도에 준하는 도시)로, 선양고궁은 유도궁전(留都宮殿, 수도 이전의 옛 궁전)으로 삼았다.

청조의 황제들은 이따금 선양에 들러 선왕께 제사를 올렸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선양고궁에 대한 크고 작은 증·개축을 진행했다. 그 중 강희·옹정·건륭·가경·도광 황제는 무려 11차례나 선양을 방문했으며, 특히 건륭황제는 선왕의 대업을 드높이기 위해 대규모 증축공사를 진행, 오늘날과 같은 동로궁전·중로궁전·서로궁전 등 3곳으로 구성된 궁궐을 완성했다.
 
동로·중로·서로궁전으로 구분

이들 3곳의 궁전은 건축된 시기가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양식 또한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에 건축된 동로궁전과 중로궁전의 일부 건축물은 몽골 및 만주족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랐고, 건륭황제 시기에 완성된 서로궁전과 중로궁전의 일부 건축물은 한족의 건축양식을 채택했다.

먼저 누르하치 시기에 건축된 동로궁전은 황족의 거소공간인 침궁(寢宮)과 대정전(大政殿)·십왕정(十王亭)·주악정(奏樂亭) 등이 있다. 이 중 주축을 이루는 대정전은세계에서 유일한 팔각정식 건물로 몽골족의 텐트를 본받았다고 한다.

또 한족의 전통건축양식에 따르면, 궁과 전은 모두 하나의 궁궐 안에 위치해 황제가 침궁에서 집무실인 전으로 이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건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동로궁전의 침궁은 대정전에서 거리가 약간 떨어진, 오늘날의 선양고궁 내가 아닌 십자형 도로에서 남북방향 도로의 북단(선양성 북문 안쪽)에 있다. 이는 만주족 전통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안전성과 편리성을 고려한 것이다. 실제로 현존하는 동로궁전의 침궁 북문 밖은 구릉지역으로 천연장벽을 이루어 안전에 도움을 주는 지형이고, 침궁에서 남쪽으로 뻗은 십자형 도로는 대정전과 직선으로 연결돼 짧은 동선을 확보할 수 있다.

대정전과 십왕정의 관계도 만주족 전통 건축양식 구조를 따랐다. 십왕정은 대정전을 중심으로 좌우 남쪽방향으로 10개의 정자가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다. 대정전과 가장 가까운 좌우 2개의 정자는 각각 좌익왕정(左翼王亭)과 우익왕정(右翼王亭)이고, 두 왕정 밑 4개씩의 정자가 합쳐 팔기정(八旗亭)이 된다. 이 좌·우익왕정과 팔기정을 통칭 십왕정이라 한다.

동로궁전 침궁은 현 궁궐 밖에 존재

팔기정은 만주족의 팔기 귀족을 상징하고, 좌·우익왕정은 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팔기 귀족의 정치력을 상징하던 십왕정은 홍타이지가 청조를 건국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점점 약화됐다.

누르하치의 대를 이은 홍타이지는 기존의 십자형 도로 체계를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도로 체계로 바꾼 중로궁전을 건축했다. 동로궁전은 십자형 도로 중간에 대정전을 짓고 북단에 침궁을 만들었으나, 중로궁전은 우물 정자 한가운데에 침궁인 청녕궁(淸寧宮)과 그 앞에 집무실인 숭정전(崇政殿)을 두었다. 이는 한족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전조후침(前朝後寢) 구조라고 한다.
 
중로궁전은 비록 한족의 전통적 궁전 배치방식을 따랐지만, 집무실인 전이 궁보다 그 표고가 더 높은 궁저전고(宮低殿高) 형식이 아닌 궁이 전보다 더 높은 궁고전저(宮高殿低) 형식을 취했다. 이는 만주족의 생활습관과 관련 있다. 만주족은 주로 산간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산허리나 구릉에 집을 지어 안전과 조망을 확보했다. 높은 곳에 거주하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던 만주족은 부자나 세력가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와 같은 전통이 중로궁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궁고전저’ 중로궁전은 만주족 양식

중로궁전의 또 다른 특징은 누(樓)와 각(閣)이 역대 궁전건축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중로궁전의 전체 면적 가운데 약 56퍼센트를 차지하는 누각들은 총 14개 동에 100여 칸이나 되는데, 대부분 창고용이다. 창고용이 이처럼 많은 이유는 만주족이 오랜 기간 동안 수렵과 어로생활을 하면서 식품의 저장과 보관 기능이 많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건륭황제 시기에 완성된 서로궁전은 기존 중로궁전 동서 양편에 동소(東所)와 서소(西所)라는 행궁(황제가 원행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과 중로 서남쪽의 가음당(嘉蔭堂)·서북쪽의 문소각(文溯閣)으로 구성돼 있다. 

동소는 황태후가 사용하는 공간이고, 서소는 황제와 황후의 행궁이었으며, 가음당과 그 주변은 황제가 연회를 베풀거나 연극을 공연할 때 사용됐고, 문소각은 중국 최고의 총서‘사고전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밖에 선양고궁에서는 커우따이방(口袋房, 일명 주머니방, 출입구가 하나인 만주족의 특유한 건축양식)과 온돌 등 만주족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조은상 / 배재대학교 교수, 중국문학>

 

출처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 이메일 100726현재

출처 : 종, 그 울림의 미학
글쓴이 : 하늘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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