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밍(昆明)은 중국 서남부 고원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시 중심이 해발 1천900미터에 달한다. 구름의 남쪽 윈난성(雲南省)의 성도이며,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춘성(春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연중 큰 더위나 추위가 없고, 항상 일조량이 풍부하며, 내내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윈난성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손꼽힌다. 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 이어지는 따리(大理)·리장(麗江)·샹그릴라에서 아름다운 자연뿐만 아니라 옛날 이곳을 오가던 상인들을 반겨주던 다양한 쉼터의 푸근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윈난성의 자연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소수민족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놀라게, 또 즐겁게 해준다. 성의 북쪽에는 오랜 만년설을 인 웅장한 5천 미터급 산들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수백 년이 넘은 차나무 밭을 지나 코끼리가 사는 열대 밀림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수억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스린(石林)과 주샹(九鄕) 동굴 등은 규모도 엄청나지만 기묘한 경치로 조물주의 솜씨를 보는 듯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차마고도로 이어지는 따리·리장·샹그릴라
윈난성에는 26개 민족 약 4천800만 명이 사는데,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이 65퍼센트, 나머지가 25개 소수민족으로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이기도 하다. 28개나 되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소수민족은 3개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소수민족과 다양한 언어만큼이나 엄청난 역사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쿤밍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남아시아·티베트계 소수민족이 어우러져 살던 이곳에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좡챠오가 현지 소수민족들과 연맹해 전국을 세우게 된다. 한(漢)나라 건국 후에는 무제(武帝)의 적극적인 변방 개발 정책으로 많은 사병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한나라 쇠퇴와 더불어 이곳은 다시 소수민족들이 각자의 세력을 형성했다가 삼국시대 제갈량의 남만(南蠻)원정으로 중국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후 중국의 중앙 권력에서 멀어지면서 따리를 중심으로 남조국(南詔國)과 대리국(大理國)이 성립돼 무역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순박한 소수민족들
천 년을 이어온 남조와 대리는 원나라 쿠빌라이칸에게 멸망하고, 윈난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쿤밍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명의 숭정제(崇禎帝)가 자살한 후 사촌동생인 주유량이 중국 서남부 지역을 통합해 남명(南明)을 세우나 실패하고, 미얀마로 도주하던 중 옛 명조의 장수 오삼계(吳三桂)에 잡혀 쿤밍에서 순국하게 된다. 이후 오삼계 역시 쿤밍을 중심으로 청조에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나 결국 그를 이어 왕을 계승한 손자가 청군에 포위돼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역사적으로 쿤밍은 대륙을 통치한 왕조의 입장에서는 정복과 반란의 땅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 땅을 꾸려나가는 주민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순박하기만 한 소수민족들로 이 곳은 그들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쿤밍의 관광은 고무줄과 같다. 워낙 둘러볼 것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무얼 보고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일정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한국인 관광객들은 일주일 일정으로 2~3일은 쿤밍 시내와 근교를 둘러보고 나머지 4~5일은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거리인 유명 관광지 리장, 따리, 샹그릴라를 다녀온다.
쿤밍 관광의 백미는 동쪽으로 8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스린(석림 : 石林)이다. 카르스트 지형으로 형성된 기암괴석 군락지로 2007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일반적인 관광 코스는 대석림+소석림으로 이루어지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인공호수가 펼쳐지고, 계단을 내려가면 먼저 코끼리 모양의 석회암 바위가 맞이한다. 돌 숲 사이 작은 광장에서는 이곳에 사는 소수민족인 이족(彛族) 주민들이 개최하는 작은 음악회를 볼 수 있다.
근교 석림, 구향동굴, 소수민족촌 볼 만
좁은 길을 통과하면 석림을 대표하는 대석림 병풍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가장 높은 지대인 망봉정(望峰亭)에서 석림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으며,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돌 숲 사이 호수인 검봉지(劍峰池)에 이른다. 소석림은 전동차를 타고 찾는다. 이동하는 길에는 옛날 수평선(석림지역은 아주 옛날 바다였으나 히말라야 고원 융기 시 수면 위로 조금씩 올라와 시대에 따른 여러 개의 수평선을 볼 수 있다)을 나타내는 돌 숲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소석림을 대표하는 것은 아스마(阿詩瑪 : 현지 토착민인 이족 말로 ‘아가씨’)라는 꽃바구니를 등에 인 여인 형상의 바위다. 소석림 광장에서는 이족 청년들의 민속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1일 2회).
쿤밍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주샹(구향 : 九鄕)동굴이다. 쿤밍에서 동쪽으로 약 9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석회암 동굴로 2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종유동굴 지대의 일부다. 개방된 곳은 약 3킬로미터 구간으로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약 50미터를 내려가 보트로 계곡부터 둘러보고 들어간다. 물과 석회암 지형이 혼합된 여러 폭포와 연못들이 볼 만한데, 특히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높이 30여 미터의 쌍폭 자웅폭포(雌雄瀑布)와 계단식 논처럼 생긴 연못 신전(神田)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소수민족의 성에 왔으면 이들의 문화와 생활상도 봐야 한다. 윈난민족촌은 디엔츠 호수 옆에 만든 관광지다. 윈난성에 사는 25개 소수민족의 생활 풍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특색 있는 주거지와 소수민족의 고유 복장을 입은 각 민족 사람들, 특히 나시족(納西族 : 리장에 거주하며 상형문자를 사용), 바이족(白族: 따리에 거주), 티베트족(藏族 : 샹그릴라에 거주), 모수인(摩梭人 : 티베트계로 모계사회 유지) 등의 거주지에서는 민속공연 관람 및 종교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다.
중국 4대 도교사원 진뎬, 공룡계곡도
쿤밍만을 관광한다면 시 동남쪽 외곽에 위치한 쿤밍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마을 관두구전(官渡古鎭)도 꼭 들러 보자. 풍경이 뛰어나 예부터 고관 귀족들이 별장을 지었고, 많은 사찰들이 건립된 곳이다. 쿤밍에서는 이미 사라진 옛 정취를 느끼고 수려한 풍광 속에 진정한 봄의 도시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중국 금강탑 10개 중 가장 오래된(1457년) 탑 동·서쪽으로 명·청조 때부터 형성된 상가들은 은 공예 등 발달한 이 지역 수공업 특산품들을 파는 곳이다.
또 여기저기서 휴식을 취하는 파란색 모자를 쓴 토박이 노인들이 쓰는 말들은 요즘 쿤밍 사람들도 알아듣기 힘든 고어라고 한다. 둘러보다 배가 고프면 떡집 옌징빠빠에서 빠빠(곡식을 쪄서 익힌 후 반죽하여 만든 떡)라는 일종의 호떡을 사먹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시간이 되면 쿤밍 북서쪽 진뎬(金殿)도 둘러보자. 1602년 명대에 지어진 도교사원으로 중국의 4대 도교사원이다. 명말 청초의 무장인 오삼계가 1671년 동으로 기둥과 기와 등을 만들었으며(윈난성 특산 동 250톤을 사용해 동와사(銅瓦寺)라고도 부름) 완공 후 그 빛이 금빛과 같아 진뎬이란 이름을 얻었다. 옆에는 1999년 쿤밍에서 열린 세계원예박람회장이 있다.
쿤밍에서 서쪽으로 70여 킬로미터 거리의 루펑(祿豊)현에 있는 공룡계곡도 찾을 만하다. 1938년 공룡화석을 발견한 이래 130여 구의 완전한 공룡 화석이 발굴됐는데, 삼첩기·쥐라기·백악기 시대의 초식·육식 공룡 등 살던 시대가 다양하다. 2008년 관광지로 지정됐고, 화석 발굴 작업 현장을 볼 수도 있다.
차마고도 따라 가보는 윈난성 명소들
쿤밍보다 더 유명한 관광지인 따리, 리장, 샹그릴라는 기차나 항공편으로 방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따위엔(大姸) 고성이 있는 리장이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인데, 이곳에서는 케이블카로 해발 3천 미터까지(3천500미터 및 4천506미터까지도 가능) 올라 5천596미터 옥룡설산을 조망할 수 있고, 지금도 소수민족 나시족들이 살고 있는 고성 3곳, 즉 따위엔 고성, 수허구전(束河古鎭), 바이샤샹(白沙鄕) 마을을 방문, 맑고 찬 옥수가 흐르는 크고 작은 수로를 끼고 펼쳐지는 전통 민예품 상가와 찻집, 술집들을 둘러보며 낭만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따리는 리장과 비슷한 분위기지만 규모가 작은 옛 따리왕국 터의 고성과 거리, 해발 4천122미터의 창산(蒼山) 19개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수로로 형성된 중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호수인 얼하이, 최근 재건한 당대의 명찰 충청스(崇聖寺)의 상징인 삼탑 등과 함께 ‘따리의 돌’대리석 본산지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샹그릴라는 최근 각광 받는 명소로, 쿤밍에서 북서쪽으로 618킬로미터 떨어진, 평지 해발이 3천380미터나 되는 고지대다. 티베트족 거주지역으로 이들의 생활상과 아름다운 야생화가 피는 들판, 해발 6천740미터 매리(梅里)설산, 5천390미터의 하바(哈巴)설산 등을 가까이서 관망하거나 산악인이라면 등산도 해볼 수 있다. 쿤밍에서 비행기로 50분, 보통 1박 2일로 다녀온다.
▶ 특이한 관습과 예절 윈난성 26개 민족은 저마다 독특한 관습이나 예절을 가지고 있다. 특히 다양한 인사법은 처음 보는 사람의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서로 다른 종교에 따른 금기사항도 많다. 보편적인 공손함과 목례는 문제가 없으며, 다양한 민족의 예절을 알고 싶다면 윈난민족촌으로 가보자.
▶ 식수, 식사 만년설산 호수에서 식수를 공급하고 있으나 수돗물을 직접 마시는 건 금물. 위생 처리된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게 좋다. 건조하고 자외선이 강해 음식물이 쉬 상하지 않는다. 보통 쌀국수와 쌀밥이 주식이나 각 민족별로 다양한 음식이 있다. 음식은 대체로 맵고 짜며, 다양한 향신료를 첨가하고 있음을 참고하자.
▶ 쇼핑, 팁, 환전 현지 특산품들은 관광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보이차나 고산 약재 등은 상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쿤밍은 해발 2천 미터 정도며, 특히 리장·샹그릴라에는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관광지도 있으므로 고산증에 주의. 환전은 미 달러에서 위안화로만 가능하다.
▶ 치안, 교통, 기타 야간엔 시내 중심가를 제외하고 조명이 어두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치안이 나쁘지는 않으나, 상대적으로 경찰 수도 적으므로 외진 곳은 주의. 도시 크기가 적어 버스 노선은 많지 않으며, 택시(기본요금 9위안)를 많이 이용한다. 신호등에 좌·우회전 신호가 없는 곳이 많고, 반대편 차량이 없을 때 급히 방향전환을 잘하기 때문에 보행 신호 때도 항상 주위의 차량을 확인해야 한다.
▶ 푸얼차 우리에겐 보이차로 잘 알려진 윈난성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다. 하니족 등 소수민족이 주로 마셨는데 명·청조에 중국 본토로 알려져 차마고도를 통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잎이 큰 차나무(大葉種)에서 채취한 잎을 발효시켜 만들며, 인공 발효과정을 거친 숙차와 자연 발효시키는 생차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마시는 보이차는 붉은색을 띠는 숙차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차 맛이 부드럽고 색깔도 맑고 투명해진다.
▶ 천연염색 의류 독립된 상형문자, 의술을 가졌을 만큼 뛰어난 둥바(東巴)문화 민족인 나시족들이 돌이나 풀 등 천연 염료로 직접 그리고 염색한 스카프, 생활의류 등은 실제로 입기보다 액자나 걸개로 사용해도 좋은 예술적 가치가 높아 리장 방문 시 한두 점 구입하는 것도 좋겠다.
▶ 삼칠 뿌리와 꽃 등을 약으로 사용하는 약초다. 명대 약학자인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삼칠을 ‘금불환’이라 하고, 기를 보충하는 데는 인삼이, 혈을 보충하는 데는 삼칠이 최고라 했다. 뿌리를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먹는데 상처나 출혈을 낫게 하고, 피로 회복 및 혈압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꽃은 말린 후 차로 끓여 마시는데 어지럼, 이명현상, 인후염 등에 효과가 뛰어나다.
▶ 치궈지(汽鍋鷄) 청조부터 윈난지방에 유행해온 보양식. 건륭황제가 윈난지역 순시 시 윈난 중남부 젠쉐이(建水)의 관리가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을의 모든 요리사들을 대상으로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공모했는데, 한 청년 요리사가 독특한 그릇에 훠궈 (火鍋 : 중국식 샤브샤브)와 찐만두 조리 방식을 혼합해 만든 치궈지란 음식이 뽑혀 황제에게 진상돼 이후 윈난을 대표하는 보양식이 됐다. 윈난 토종 닭을 치궈라는 용기에 담아 동충하초·삼칠·당삼·복령 등의 약초들과 함께 고아낸 탕으로 여러 가지 약재를 아우르면서도 담백한 맛과 뛰어난 영양분으로 건조한 고원지대에서 폐를 보호해주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 궈챠오미시엔 이 지역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쌀국수 일종. 윈난성 멍쯔 지역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마음을 다스리고 공부하기 위해 마을 남쪽 호수 안의 작은 섬에다 공부방을 차렸다. 책 보기를 좋아해 부인이 챙겨주는 식사를 잊어버리고, 식은 밥과 반찬을 먹기 일수였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던 부인이 하루는 닭을 잡아 국물을 우려내고 여기에 쌀국수를 넣어 전해주었다. 나중에 그릇을 가지러 간 부인은 그때까지도 남은 국물이 따뜻해 까닭을 연구해 보니 위에 얇게 층을 이룬 닭 기름이 보온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후 매일 다리를 건너 남편에게 따뜻한 쌀국수를 대접했고, 이로 해서 본 이름을 얻게 된다.
오삼계(吳三桂)라는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국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청나라 황제와 명나라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회옥공주(懷玉公主)’나, 명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강산풍우정(江山風雨情)’이란 드라마를 통해 이미 만나보았을 수도 있겠다.
오삼계는 명나라 말 최고의 명장이라는 칭송을 듣다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가족과 국가마저 배신한 그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그렇다면, ‘너무나 아름답다’는 그 이유 때문에 한 인간을 미치게 하고, 나라마저 망하게 한 절세의 미녀는 누구인가? 바로 시가 ‘원원곡(圓圓曲)’의 여주인공 진원원(陳圓圓)이다.
‘원원곡’은 청나라 초 오위업(吳偉業 : 1609∼1671)이 쓴 장편 서사시다. 그 내용은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청나라 군대와 연합해, 당시 베이징을 함락한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을 격퇴하고 자신의 연인 진원원을 되찾게 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바꾼 오삼계
오삼계는 명나라 금주(錦州) 총병관 오양(吳襄)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계속 승진해 요동(遼東) 총병이 됐다. 진원원은 시와 문장이 뛰어나고, 가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용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남 출신의 명기였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오삼계가 발령지로 떠나기 전 아버지와 함께 전굉우(田宏遇)의 집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진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보자 한눈에 반해 거액을 들여 그녀를 첩으로 맞아들인다. 그리고는 그녀를 집에 맡겨두고 요동으로 떠난다. 산해관을 거점으로 청군(淸軍)의 진출을 막던 오삼계는 청 태종의 끊임없는 귀순 종용에도 꿋꿋이 버텼다. 그러던 중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져 베이징 방어의 명을 받고 구원에 나선다.
그러나 베이징이 함락되고 숭정제(崇禎帝)가 자결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자성의 협박을 받은 아버지 오양으로부터 이자성에게 귀순하라는 편지를 받았지만 듣지 않고 오히려 산해관의 문을 열어 청나라 군대를 받아들여 명나라의 반역자가 돼버린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 중심에 바로 진원원이 있었던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까 하던 차에, 자신의 애첩 진원원이 이자성의 부장인 유종민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극도로 분노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의 연인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연인은 되찾지만, 결국 온 가족은 몰살되고 명나라를 청나라에 넘겨준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을 받고 만다.
죄인이 되고 사랑을 되찾지만 사랑은…
‘원원곡’은 오삼계와 진원원의 애정사를 다루고 있지만, 작가는 오삼계가 한 여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으로 가족과 조정 나아가 민족의 운명을 바꿔 놓은 배반행위를 풍자하고 있다.
“(전략) 원원의 어릴 적 이름은 교라기라네/ 꿈 속에서 부차의 궁원에서 노닐었는데/ 부차가 일어서니 궁녀 원원을 껴안았다네/ 진원원의 전생 연꽃 따던 서시와 흡사하네/ 문전에 횡당수가 흘러간다/ 횡당수에 두 개의 상앗대 날듯이 저어 가는구나/ 세도가 어느 집에서 강제로 태우고 가는가/
이때야 박명함을 어찌 알았겠는가/ 주후의 집안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 궁중과도 연이 있었는데/ 맑은 눈동자 새하얀 이의 진원원 아끼지 않았다/ 궁궐에서 돌아와 전비 사가의 가기로 파묻혔으나/ 새 노래 배워서 좌중을 뒤흔들었다/ 손님들 술잔을 날리다 보니 붉은 해 저물어 가는데/ 한 곡조 슬픈 음악 누구에게 하소연하나/ 하얀 얼굴의 통후 가장 나이가 어렸는데/ 꽃나무 가지를 골랐는지 몇 번이나 되돌아 봤다네.
얼른 새장 속의 어여쁜 새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얼마나 기다리면 은하수를 건널 수 있을까?/ 한스럽구나 군영의 편지 당도했는데 죽음을 재촉한다 하네/ 그리워하는 뒷날의 약속/ 남기고 떠났으나 사람을 그르치고 말았네/ 하루 아침에 개미떼처럼 역적들 장안에 가득 찼다/ 가련한 아낙네는 누각 위에서 버드나무만 보아도 수심 가득하고/ 하늘 저 끝에서 흩날리는 버들개지로 볼 뿐이네.
여기저기 녹주를 찾느라 집을 에워쌌고/ 호되게 호통 치니 강수가 꽃무늬 장식한 난간에서 나오네/ 만약에 장사들과 병사들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필 말을 타고 미녀가 돌아왔겠는가 (후략)
진뎬·취호…쿤밍 명소에 남은 흔적들
명의 장군에서 청의 공신이 된 오삼계는 평서왕(平西王)이 되어 운남(雲南) 지역을 다스리다, 청조에 반대해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이리하여 오삼계를 빼놓고 운남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쿤밍은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유서 깊은 사원과 건축물이 많다. 그 중에서도 오삼계가 연인인 진원원을 위해 재건했다는 진뎬(金殿)은 기둥, 지붕, 문 등이 모두 청동으로 무게가 200톤이 넘는다. 건물 안에는 신선상이 안치돼 있는데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라 한다.
진뎬을 만들어 줄 만큼 오삼계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오삼계는 왕이 된 뒤 왕비로 다른 여자를 세우고 여러 명의 첩을 두면서 진원원을 멀리했다. 진원원도 곡절 많은 인생에 무상함을 느껴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고 한다.
쿤밍의 오화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취호(翠湖) 공원도 오삼계가 진원원에게 지어준 별장이라고 한다. 호숫가에는 수양버들이 우거지고, 호수 안에는 각양각색의 연꽃이 피어 있어, 이름 그대로 푸르름이 뚝뚝 듣는 아름다운 호수다.
<이상은 / 상지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출처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 이메일 100920현재
출처 : 종, 그 울림의 미학
글쓴이 : 하늘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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